[한국의 역사, 그리고 커피①] 근대사에서 찾은 커피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커피를 좋아하는 일에도 이 이야기는 통용된다.
어떤 이의 눈에는 그저 검은 물 한잔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운명의 전환점이 되었을 역사 속 커피.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에 뿌리내리고, 시대와 함께 변해온 한 잔의 커피 이야기.
참고도서 <실용커피서적> 따비 / <커피인문학> 인물과 사상사
사진 국가기록원 / 서울역사박물관 / 한국문화재보호재단 / 해외문화홍보원 / 인천 화도진도서관

조선의 커피
국내 커피의 역사를 정확하게 진단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일단 자료가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 국내에 처음 커피가 들어왔는지 조차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첫 커피 애호가로 고종을 떠올리지만, 이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한 편이다. 엄밀히 말해 고종이 마신 커피는 우리나라의 첫 커피가 아니라는 것.
1896년 아관파천이라는 역사적 혼란 속에서 과연 그가 여유롭게 커피에 심취할 수 있었는지, 덕수궁 ‘정관헌’이 정말 고종이 커피를 마시면서 시간을 보냈던 곳인지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 <한성순보> 1884년 3월 27일자에는 “이탈리아 정부는 시험 삼아 차와 가배를 시칠리아 섬에 심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초대 주한 영국 영사를 지낸 윌리엄 칼스가 1884년 5월, 우리나라에 부임하면서 쓴 <조선 풍물지>에는 “한양에 부임하면서 숙박 시설이 없어 조선 세관의 책임자인 묄렌도르프의 집에서 묵었는데, 뜨거운 커피가 제공되어 고마웠다”고 쓰여 있다.
이외에도 아관파천보다 10년 앞선 1886년, 관료였던 윤치호가 중국 상하이에서 쓴 일기에는 “돌아오는 길에 가배관에 가서 두 잔 마시고 서원으로 돌아왔다”라고 적혀 있으며, 이후 1897년 독립신문 영문판에 ‘자바 커피’라는 단어가 나오는 걸 보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커피가 등장한 시점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커피를 마셨던 때보다 훨씬 이를 것이라 짐작해볼 수 있다.

카페라는 새로운 문물을 만나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카페는 1902년 고종의 후원으로 독일계 프랑스인 여성 앙투아네트 손탁이 서울 정동에 세운 손탁호텔의 1층에 위치한 정동구락부라고 알려져있다. 구락부는 공동의 관심사나 목표를 가지고 정보를 나누면서 함께 즐기는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말로 ‘클럽’의 일본식 음역어이다.
고종은 당시로서는 꽤 유난스러운 커피 마니아였음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1895년 발생한 을미사변으로 인해 1896년 2월부터 황태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게 되면서 고종은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를 통해 처음으로 커피를 접하게 되었다. 이 시기, 고종의 커피 시중을 들었던 사람이 바로 손탁으로, 이 때의 인연에 힘입어 손탁 호텔까지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인천 제물포항이 개항되면서 인천은 외국인들이 자유로이 거주하면서 치외 법권을 누릴 수 있는 조계가 여러 곳에 설치되었다. 각국 조계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늘면서, 1888년에 조선 최초의 호텔 인천 대불호텔이, 1891년에는 제물포구락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나라의 중요한 외국 손님을 맞는 고급 호텔은 바로 서울의 손탁호텔이었다.
구한 말, 정동구락부는 조선에 서양의 음식과 커피 문화를 소개하는 전초기지였다. 또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영어 등 다양한 언어로 손님을 맞이했고, 통역사나 가이드, 짐꾼, 승마 등 각종 서비스가 가능했기 때문에 외국에서 온 정치가는 물론 조선을 찾는 대부분의 외국인들이 이용했다고 한다.

예술가들의 아지트, 다방
우리나라 최초이자 가장 대중적인 카페는 1909년 서울 남대문에 문을 연 ‘남대문역 끽다점’을 효시로 삼을 수 있다. 차를 마신다는 의미를 담은 ‘끽다’는 차 문화가 발달한 한자 문화권에서 사용하던 단어로, 일본에서는 근대화 초기부터 ‘찻집’이라는 뜻으로 ‘끽다점’이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했다.
1915년 조선 총독부 철도국에서 발행한 <조선 철도 여행안내> 책자에서는 ‘남대문역 끽다점 내부’라는 글과 함께 사진을 게재하고 있어 당시 모습을 알 수 있다. 최초이기는 하나, 남대문역 끽다점 역시 일본인 소유이자, 조선 총독부 직영의 가게였다. 그렇다면 조선인이 오픈한 최초의 카페는 어디일까.

현재까지는 1927년 국내 최초의 영화감독 이경손이 종로구 관훈동에 개업한 카페 ‘카카듀’라고 알려진다. 이경손이 직접 차를 끓여 내던 곳으로, 한글 간판과 이국적 분위기의 실내 장식 등 당시에는 볼 수 없는 과감한 분위기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경영이 미숙하고 손님도 많지 않아서 아쉽게도 수개월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고 한다.
최초의 카페 카카듀의 모습은 영화, 연극 등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2016년 김지운 감독의 영화 <밀정>에서 극 속 ‘이정출’의 비서 역할로 나왔던 ‘김사회’가 커피숍에서 정보원에게 정보를 받는 장면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듬해 1928년에는 영화배우 복혜숙이 종로2가에 ‘비너스’라는 카페를 열었으며, 뒤이어 극작가 유치진이 ‘브라다나스’를, 조각가 이순석이 ‘낙랑팔러’를, 시인 겸 소설가인 이상이 ‘제비’라는 이름으로 경성 시내에 다방을 열었다. 당시 명동, 종로, 소공동, 충무로 일대에는 문화예술인들이 경영하는 카페가 수십 곳이나 존재했다. 당시 카페는 예술가들의 아지트이자, 작가 협회나 사무실 역할을 했던 셈이다.